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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598. 12. 16. 노량해전

by Yulpo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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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일본군의 부산포 상륙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일본군의 재침공인 정유재란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전투가 바로 1598년 12월 16일, 현재 기준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해상에서 벌어진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이 벌어진 경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로병진작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조명연합군은 남해안의 왜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1598년 10월 18일~21일 사이 동로, 중로, 서로, 수로의 네 방면으로 일제히 공세를 펼치는 이른바 사로병진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중로(사천왜성), 서로(울산왜성)에서 패배하고, 동로(순천왜성)의 경우에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한 순천왜성을 함락하는데는 실패하였으나,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함대로 구성된 수로군이 순천왜성(왜교성)을 해상에서 차단하고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 함대 500여척이 1598년 12월 15일 밤 순천을 향해 출진하였고, 이순신-진린 함대가 길목인 노량 부근에서 이를 요격함에 따라 벌어진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일본군 함대는 밤을 틈타 순천의 고니시 군과 함께 포위망을 뚫을 생각이었으나, 길목인 노량에서 차단당했고, 진린 함대는 좌측, 이순신 함대는 우측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조명 연합수군에게 포위당하지 않기 위하여 전장을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야간인데다 지리에 익숙치 않아 열린 바다로 착각하고 관음포로 진입하는 바람에 포위망에 갖히게 되고 말았다.

 

결국 포위망을 뚫으려는 일본군과, 이들을 섬멸하려는 조명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는 일본 함선 200여 척을 격파한 조명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1598년 12월 16일 오전 8시경 조선수군 최고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이 때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유언을 남겼다. 전투 중 명군 부지휘관(부총병)인 등자룡도 전사하였다. 한편, 시마즈 요시히로는 포위를 뚫고 탈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가 벌어지는 틈에 도주하였다.

 

양측 수군을 합쳐 적어도 약 700여 척이 넘는 함선이 교전을 벌인 대규모 전투였다는 점, 야간 전투라는 점에서 근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 기존 임진왜란 해전에 비하여 양측 주요 지휘관들 다수가 전사한 전투라는 점 등에서 매우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난 7년간 참혹한 침략을 겪어 온 조선군으로서는 일본군을 온전히 돌려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차수약제 사즉무감, 此讐若除 死則無憾)라는 말을 남겼고, 그 결의대로 전투에 이기고, 전쟁을 마쳤으며, 영원한 삶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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