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간만에 눈도 펑펑 내려서 빙판길이 곳곳에 생겼습니다.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은 힘든 일이고 추위를 견디며 생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보통 일이 아닙니다. 춥고 궂은 날씨의 겨울에는 전쟁을 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강풍과 눈 때문에 항공기가 뜨기도 어려울 것이고 추위를 버틸 수 있는 제대로 된 방한 장비가 없다면 싸우기도 전에 지칠 것입니다.
그런데, 1944년 12월에 프랑스의 아르덴이라는 삼림 지역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계속 밀려나던 독일군은 1940년에 프랑스를 침공하는 루트로 사용했던 지역에서 반격함으로써 다시 한번 성공을 노려 보았으나 결국 연합군의 물량과 기민한 대처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944년 12월 16일에 개시된 이 전투는 오늘날 아르덴 공세 또는 벌지 전투라고 불리웁니다. 벌지(Bulge)는 돌출부라는 뜻인데, 독일군의 공세에 의하여 전선이 돌출된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인 만큼, 영화, 게임 등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다양하게 다루는 소재입니다.
벌지 전투를 소재로 한 보드게임도 상당히 많은데요. 현 시점에서 보드게임긱 사이트에 등록된 게임만 105개에 달합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자면, 우선 간단한 규칙과 아기자기한 미니어쳐로 유명한 액시스 액 얼라이즈(Axis&Allies) 시리즈 중에 벌지 전투를 주제로 한 게임이 있습니다.
본래 액시즈 앤 얼라이즈는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지도 위에서 보병, 전차, 전투기, 전함 등의 미니어쳐로 묘사된 유닛을 가지고 2차 세계대전 전체를 경험할 수 있는 게임으로 유명한데, 이처럼 특정한 전투를 소재로 한 게임도 존재합니다. 시리즈 내에서 비슷한 종류의 게임으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과달카날 전투를 다룬 게임이 있습니다. 참고로 벌지 전투의 경우 현재 단종되어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다음으로는 워게임의 명가라고 할 수 있는 GMT games에서 출시한 아르덴 '44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정통적인 헥스(Hex) 방식의 워게임인데, 디자이너가 유명한 Mark Simonitch라는 분으로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게임을 디자인한 작가입니다. 이 분이 디자인한 게임들 중 프랑스 '40, 노르망디 '44, 스탈린그라드 '42, 살레르노 '43과 같이 전투가 벌어진 지역과 연도를 표기하는 방식의 제목을 가진 게임들은 일종의 시리즈로서 유사한 룰과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고, 하나같이 명작이라는 평을 듣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벌지 전투를 다룬 보드게임이 사용하는 시스템을 보면 헥스 방식 워게임이 가장 많은데, 특이하게 블럭을 사용한 워게임도 존재합니다. GMT games에서 출시한 FAB : Bulge라는 게임이 바로 그것입니다.
블럭을 사용하는 게임의 경우, 상대방 유닛과 전투하기 전까지는 어떤 유닛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전장의 안개'를 구현하는 데 적합합니다. 통상 유닛이 데미지를 받을 경우 블럭을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킴으로써 전투력이 줄어든 것을 표현합니다. 단점으로는 솔로 플레이를 주로 하는 워게이머들에게 있어서는 플레이할 상대방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솔로 플레이어를 위한 벌지 전투 게임은 없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물론 있습니다. 사실 워게임에 있어서는 꼭 1인 전용 게임이 아니더라도 혼자 1인 2역을 하면 그것이 솔로 플레이가 되기는 합니다만...
눈 내린 12월 풍경에서 벌지 전투가 떠오른 김에, 일본의 역사군상이라는 역사 잡지의 2018년 8월호 부록으로 나온 1인용 게임인 '벌지 전투'를 살짝 세팅해 보았습니다.
이 게임은 보드 워게임 및 벌지 전투의 역사적 내용을 소개하는 것을 겸한 입문용 게임에 해당하기 때문에 구성요소도 적고 지도도 작습니다. 그러나 게임의 단순함을 떠나서 지도나 전투서열 등의 내용을 보면 당시 전투를 충실하게 구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지도 뒷면에는 또다른 게임인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사용하는 지도가 인쇄되어 있는데, 다음 기회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게임 룰은 상당히 간단합니다. 플레이어는 독일군의 입장에서 공세를 펼치고, 방어하는 미군의 경우 이동이나 공격을 하지 않고 제 자리에서 수비하는 방식입니다. 공격의 경우 공격과 방어 유닛들의 전투력 비율을 따져서 주사위 굴림에 따라 전투결과표(CRT)를 통해 해결하는 전통적인 시스템입니다. 독일군 유닛이 손해를 입으면 지도 상에 표시된 부대의 전투력이 감소하게 되고, 일정 수치 이하가 되면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해집니다.
방어하는 미군 유닛의 경우 처음 배치할 때, 각 그룹별로 종이컵 등을 사용해서 랜덤하게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데, 플레이어도 미군 유닛의 전투력을 알 수 없도록 뒷면으로 배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적의 정보를 알기 어려웠던 당시 독일군의 상황을 표현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리플레이성을 보장해주는 장치인 것 같습니다.
그 밖에 전투의 특징을 살리는 특별한 규칙으로서, 1턴에만 사용 가능한 독일군 150기갑여단 및 하이테 공수여단 칫이 있고, 연료부족 판정 체크, 교량파괴, 바스토뉴 지역 증원 룰 등이 존재합니다. 작고 단순한 게임이라서 재미를 보장할 수 없는 게임이지만 담을 수 있는 룰은 최대한 담으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게임 잡지가 아닌, 역사 잡지에 이러한 보드 워게임이 부록으로 출시될 수 있다는 점이 부럽기도 하고, 이런 게임들이 지속적으로 제작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워게임이라는 장르를 소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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