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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593. 3. 14. 행주대첩

by Yulpo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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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1군이 부산 인근으로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20일만에 조선의 수도 한성을 점령합니다.

1593년 3월 14일,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서는 조선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행주대첩이라고 불리는 전투입니다.

공성전에서 수비측이 공격측보다 유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행주대첩의 경우, 숫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이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한 공격을 막아내고 큰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전투입니다.

행주대첩 직전인 1593년 2월 27일, 일본군은 벽제관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서 기세등등한 상황이었습니다. 권율은 명군이 한성을 공략할 때 가세하기 위해서 한양 서북방에 위치한 행주산성에 진을 쳤는데, 정작 명군은 퇴각하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조선군 병력 약 3천명에 대하여 일본군 약 3만명이 공격하였으니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당시 행주산성도 대부분 흙으로 만들어진 토성으로서 조방장 조경이 목책을 이중으로 설치하는 등 방어를 강화하였으나 흔히 상상하는 견고한 산성의 모양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새벽부터 일본군은 약 여섯차례나 공세를 펼쳤으나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고 화차, 총통 등의 화력을 보유한 조선군의 방어에 의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퇴각합니다.
 
화차란, 수레에 신기전(로켓 추진식 화살) 또는 승자총통(철환이나 화살을 발사하는 소형 화약무기)을 장착하여 발사하는 무기입니다.

기동력과 화력을 함께 갖춘, 마치 오늘날의 다련장로켓포를 연상하게 하는 무기인데 기록에 의하면 행주대첩에서 수레 1대에 승자총통 40개를 장착한, 이른바 변이중화차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화차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wacha-Shinkigeon_Style2.jpg#filelinks]

 

승차총통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승자총통은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크기의 화약 무기인데, 약간 과도기적인 무기로서 조총보다 사용이 불편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후에 조총으로 대체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른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총대장인 우키다 히에이에가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보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와 조선군이 분전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 지휘관의 면면을 보더라도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등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참가한 대전투였습니다.

특이한 점으로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주역이 되는 이시다 미츠나리도 행주산성 공격에 참가하였으나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사실입니다.
 

행주대첩 기록화 [출처 : 행주대첩 기념관]

조선군의 승리로 끝난 행주대첩 결과, 일본군의 기세는 꺾였고 이후 강화협상이 이어진 끝에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퇴하게 됩니다.

흔히 행주치마라고 알려진, 여성을 비롯한 백성들이 치마로 돌을 나르는 등 조선군을 도와 전투에 참여했다는 일화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양력으로 1592년 3월 14일(음력 2월 12일) 벌어진 행주대첩. 약 10배가 넘는 적에게 승리한 전투이자, 일본의 주요 다이묘들에게 승리한 전투로서, 가히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이라고  불릴 만한 전투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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